에 대한 21세기 답변

<가타카>(1997)<이퀄스>(2015)를 통해 바라본 실존주의

존재할 용기가 필요한 현대인들

 

1) 가타카와 이퀄스, 20년 사이에 무엇이 바뀌었는가?

 

영화 <이퀄스>가 지난해에 개봉했을 때, 대중과 대부분의 평론가들이 ‘20년 전의 <가타카>와 너무 비슷하다’며 신선하지 못하다는 평을 내렸다. 물론 두 영화의 톤과 배경설정을 보았을 때는 그러하다. 하지만 끝에서 관객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정반대의 것이다.

 

1997년 앤드류 닉쿨 작(作)의 <가타카>는 우생학이 지배하는 가까운 미래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해 유전자가 조작된 사람들은 ‘Valid’로 불린다. 반면 전통적인 방법으로 태어난 생명들은 ‘Invalid’로 규정되어 후에 종사할 수 있는 직종이 재한된다. 주인공 빈센트 프리맨은 후자에 속하지만 어릴 적부터 우주 탐사자를 꿈꿔왔다. 결국 빈센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거부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Valid’에 속하는 제롬 머로우의 유전자를 매매하여 그의 신분으로 위장하여 가타카의 우주 탐사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2015년에 개봉한 드레이크 도레무스의 <이퀄스>가 배경으로 한 사회의 모습도 가타카의 것과 매우 흡사하다. ‘Collective’ 사회에서 시민들은 모두 동등하다. 모두가 정신적 안정 상태를 유지하고 있고, 감정과 질병이 멸종된 사회이다. 물론 성적 접촉이나 공개적인 감정 표현은 금기시된다. 주인공 사일러스와 니아는 ‘Atmos’라는 우주 탐사의 미덕을 격찬하는 회사의 직원들이다. 니아는 우주탐사와 인간의 역사의 스토리 보드를, 사일러스는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일을 담당한다. <가타카>에서는 왜 이 사회가 이렇게 됐는지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지만 <이퀄스>의 세계에서는 종전에 전쟁으로 인해 인류의 멸종위기가 왔던 것으로 보인다. 영화의 세계 말고도 두 영화의 공통점이 있다면 소위 말하는 오피스 로맨스이다. 빈센트 프리맨은 ‘Valid’한 아이린과, 사일러스는 니아와 모든 것을 건 연애를 시작한다. 이 외에도 영화의 전체적 색감이나 차가운 디스토피아적 대화를 공통점으로 꼽을 수 있겠다.

 

이렇게 비슷해 보이는 두 영화는 차이는 인류의 존재 의미를 우주에 두느냐 마느냐에 있다. 다음은 빈센트가 토성의 달인 타이탄으로 가는 우주선을 타고 이륙하기 직전인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하는 말이다.

 

이 세상에 오지 말았어야 했던 사람인 것 치고는, 고백하건데, 갑자기 떠나기가 어렵다. 물론, 우리 몸을 이루는 모든 원자가 한때는 별의 일부분이었다고 한다. 떠나는 게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는 것일지도.

 

빈센트는 지구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이다. 자신의 신분을 내어준 제롬과 동료이자 연인인 아이린과 잠시나마 연대가 있었지만 빈센트는 인류와 사회에 전체적으로 신뢰를 잃고 우주 탐사를 동경한다. 빈센트뿐만 아니라 <가타카>의 모든 시민들이 우주 비행사들을 엘리트로 추대하는 모습을 보아 이 사회 전체가 우주 탐사에 집착한다. 반면 사일러스는 빈센트와 같이 인류의 존재 이유를 우주에서 찾으려고 하는 사회에 살고 있지만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니아에게 ‘모든 것은 다 여기에 있어’라고 말한다. 우리 사회의 어떤 변화가 동일한 세계에서 살고 있는 두 등장인물이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게 한 것일까? IndependentDown to earth: A childhood obsession with space의 필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서른 살 이하의 사람이 이해하기는 어렵겠지만 우리 세대 아이들은 우주 탐사선의 발명으로 인해 미래의 우주여행에 대한 긍정이 있었고 냉전과 테러의 현실에 맞서 이런 꿈을 갖는 것이 필요에 가까웠다. 냉전은 우주 경주를 시작해 달나라에는 사람을 보냈고, 지구에는 어린 아이들에게 핵전쟁에 대한 공포를 주입했다.

 

7,80년대에 유년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지구의 종말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고, 우주선을 목격하는 동시에 TV에서는 <스타트랙> 시리즈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시리즈를 시청하면서 우주에 대한 따뜻하고 긍정적인 비전을 갖고 자란다. 특히나 60년대에 시민권운동이 전개되고 NASA가 우주비행사들을 대거 모집하는 것을 보면서 가까운 미래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주를 왔다 갔다 할 수 있다고 믿게 된다. 하지만 1993년 스타트랙 스핀오프 시리즈 <The Next Generation>이 예언했던 것처럼 곧 인간의 우주 탐사는 예상하지 못한 위험요소 때문에 멈추게 된다. 우주여행의 현실화 대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비디오 게임이었다. 처음에는 NASA의 우주여행 프로젝트와 관련 있어 보였지만 인터넷부터 닌텐도 Wii, 그리고 iPad까지 이어지면서 곧 공상과학은 소비주의로 변질됐다. 시뮬레이션 게임은 할 수 있게 됐지만 인류가 연대하여 우주라는 새로운 공간을 맞이하는 꿈은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우주탐사는 환상의 영역에서 정치적인 공간으로 이동한다. 따라서 <가타카>의 제작진과 <이퀄스>의 제작진은 우주탐사에 대한 의견이 완전히 달랐을 터이다.

 

2) 우주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역설적으로 인간성을 논하다.

 

<가타카>의 등장인물들이 하는 선택은 퇴폐적이고 멋있어 보이지만 결국 모두 공허하다. 빈센트와 아이린의 사랑도, 빈센트가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떠나 삶의 의미가 사라진 제롬의 자살도, 심지어 빈센트가 우주 비행사가 되고 싶어 하는 이유 모두 공허하다. 하지만 20세기 말에 인간의 존재 이유를 몇 억 광년 떨어진 우주에서 찾으려고 했던 인간의 환상이 깨진 21세기에는 새로운 삶의 의미를 만들어야만 한다. 21세기 우주 영화의 특징은 지구를 망친 것은 인간이지만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도 인간이다. <이퀄스>의 등장인물들은 디스토피아에서도 끊임없이 삶을 긍정한다. 니아는 자신이 S.O.S(Switched On Syndrome)에 걸렸다는 사실을 깨닫고서도 치료도 자살도 거부하고 정체성을 간직하려고 노력한다. 심지어 사일러스는 니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가장 어두운 순간에서도 죽음 대신 ‘치료’를 택한다. 치료를 받은 뒤에도 사일러스의 감정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결말을 내놓은 이 영화는 인간은 선택을 회피하지 않고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고 주장한다. <이퀄스>의 사회가 감정을 억누르는 이유는 전쟁이 감정으로 인해 터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분적으로는 사실이지만 인간성을 부정하고 저 멀리 있는 우주를 바라본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집단적으로 규제하고 인류가 더 바람직한 선택을 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해결책이다. 물론 이 주장은 1984, 멋진 신세계, <로건의 탈출> 등 예전부터 반복적으로 다양한 매체를 통해 소개됐다. 하지만 이 주장은 어느 때보다 지금 가장 중요하다. 영화 <월-E>가 2008년에 예측한 것처럼 2010년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은 존재이유를 고민하지 않고도 일생을 보낼 수 있을 만큼의 방해요소를 갖고 있다. ‘우리는 왜 존재하지?’ 혹은 ’내 인생을 갖고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머리 아픈 질문을 떨칠 수 있는 재미난 것들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이것은 생존하는 것이지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려면 홀로그램 스크린에서 눈을 떼고 삶의 의미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것이 가장 힘들더라도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우주탐사 영화가 현실 도피적이라는 법도 없다. 오히려 20세기 말에 우주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서 우주에 대한 더욱 구체적인 비전이 대중화 되었고, 동시에 인간성을 긍정하는 명작이 많이 나오고 있다. 앤드류 스탠튼의 <월-E>(2008)에서 우주선의 조종사가 지구로 돌아와 인류 역사를 재창조하는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알폰조 쿠아론의 <그래비티>(2013)은 배경만 우주이지 주인공이 무중력 상태에서 인간의 공포와 존재의미를 90분간 고민하게 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터스텔라>(2014) 역시 복잡한 물리학 이론이 나오긴 하지만 결국 주제는 사랑과 인간 연대이다. 70년대 <에일리언> 시리즈를 제작한 리들리 스콧의 <마션>(2015)에서는 주인공이 매우 구체적인 이론을 바탕으로 한 현실적인 방법을 통해 화성에서 살아남는다. 하지만 여기서도 ABBA의 팝송을 들으며 삶을 긍정하는 태도는 빠짐없이 나온다. 핵심은 우주라는 공간에 대해서 알아가면서도 우리 각자의 생존 이유를 갖는 것이다. 우리가 왜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해보기도 전에 죽기 쉬운 현대 사회에서 우주 영화들은 묻는다. 인터넷, 닌텐도, 그리고 iPad 등의 방해요소가 사라진 우주라는 공간에서 우리가 살아갈 자신이 있는지.

 

puppysizedelephant

아름다움에 대하여

아메리칸 뷰티(1999) 샘 멘데스

 

미국적 아름다움은 사회 대타자의 규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고유한 삶의 아름다움에 있는 것이다.”

 

영화는 캠코더 속 여자아이가 보이지 않는 남자에게 자신의 아빠가 살아있기에는 너무나 창피한 존재라며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오프닝 크레딧 없이 바로 타이틀 “American Beauty”가 뜬다. 느와르에서 나올 법 한 ‘내가 죽여줄까’ 라는 대사 바로 뒤에 나오는 이 제목은 영화의 결말 전까지는 역설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파탄 직전인 레스터의 가정과 파시스트 아버지가 군림하는 옆 집 리키의 가정에는 아름다움이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결말에 가서야 관객은 “American Beauty”라는 제목이 아이러니하게 쓰인 것이 아니라 직설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레스터]가 아내에게 충실해야 한다는 이상적 사회 규범—개인 주체의 욕망과 향유를 지배하거나 억압하는 타자로 기능하는 사회의 상징체계를 라깡(Jaques Lacan)은 대타자(the Other)라 부른다—을 거부하고, 자신의 향유를 찾아 캐롤린이 아닌, 다른 여자에게서 결핍을 채워주는 환상대상—다시 라깡의 용어를 빌리면, objet a(알파)—를 구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며 사랑의 환상을 일으키는 안젤라는 파란 눈, 금발머리, 날씬한 몸매를 가진 젊은 백인 여자로서 미국의 전형적이고 이상적인 미인상을 구현하고 있다. 남편으로서, 직장인으로서 마땅히 따라야 할 것으로 요구되는 사회규범을 거부하는 레스터가 반하게 되는 대상이 미국의 미인 담론, 이데올로기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상미의 모습을 가진 여자라는 점은 매우 역설적이다. [1]

칸트는 모든 개념과 목적으로부터 자유로운 아름다움을 “자유미”라 한다. 이와 달리 어떤 개념이나 이상에 의존하여 평가된 아름다움을 “의존적인 미”라 부른다. 비슷한 맥락에서 라깡도 “아름다움은 이상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이상미에 사로잡힌 것은 캐롤린도 마찬가지이다. 그녀의 성욕을 충족해주는 대상은 유능한 부동산 중개업자 버디이다. 영화에서의 이상미는 힘, 권력이다. 버디의 슬로건은 ”King of Real Estate”이고 캐롤린과 관계를 하면서도 자신을 ‘왕’으로 부를 것을 요구한다. 그 외에 ‘끌림’에 권력이 작용하는 모습을 안젤라와 제인의 관계와 제인과 리키의 관계에서 볼 수 있다. 제인은 남자들의 선망의 대상인 안젤라에게 동경심과 열등감을 느낀다. 그러던 중 리키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캠코더로 찍고 제 이름을 뒷마당에 크게 써놓는 등 숭배와 가까운 행동을 하자 그로부터 느끼는 권력에 끌린다. 그 외에도 총, 프랭크의 화법 등에서도 나타난다.

레스터와 캐롤린 둘 다 이상미에 사로잡히지만 서로 다른 결말을 맞는다. 먼저 레스터는 안젤라가 자신이 숫처녀임을 고백하자 그녀의 왼쪽 가슴에 귀를 대고 진심임을 확인한다. 레스터가 안젤라와의 섹스를 중단하는 것은 아마 그의 환상이 얼마나 허황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은 섹스를 한 번도 해보지 못했으며 막상 하려고 하니 팔다리가 굳은 것처럼 있는 소녀는 자신의 상상 속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을 유혹하고 만져왔던 소녀와는 너무 다르다. 이것은 그가 사회의 이상미 이데올로기에 의해 자극된 욕망에 더 이상 종속되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켰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2] 안젤라가 화장실을 간 후 옛날 가족 사진을 보며 미소를 짓는 것은 그가 단순히 일탈을 관두고 원상복귀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규정해온 대타자로부터 해방된 삶의 소중함, 고유한 아름다움, 향유를 깨닫는 자기구원의 순간이다. 한편 캐롤린은 대타자의 영역에 남는다. 캐롤린은 버디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 욕망을 방해한 레스터에 대한 혐오에 굴복한다. ‘피해자가 되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 가해자가 되길 선택한다. 그녀에게 아름다움은 사회적으로 규정된 가치이다.

영화 속 자유미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인물은 리키이다. 리키는 아버지 프랭크가 원하는대로 순응하는 척 하지만 대마초를 팔아 돈을 벌고 일반적으로 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녹화하면서 거기서 아름다움을 본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아버지의 강박적 삶을 뒤흔들면서 집을 나오듯이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사회일반의 이데올로기를 전복시킨다.

마지막으로 “American Beauty”는 영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상징인 빨간 장미의 이름이기도 하다. 레스터가 안젤라에 대한 환상을 할 때마다 등장하는 빨간 장미는 그가 죽을 때 그의 머리맡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 빨간 장미를 다양한 맥락에 배치함으로써 아름다움(beauty)의 이슈가 사회의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단순 명백한 문제가 아니라 표면을 뚫고 성찰해야 할 다층적인 문제임을 암시한다.

+촬영 및 편집 방식에 대하여

<아메리칸 뷰티>는 고전적 내러티브 방식을 따르고 있지만 편집이나 촬영 형식으로는 반영화운동에 전형적이었던 기법을 전유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영화 속에는 두 대의 카메라가 등장하는데 하나는 영화를 찍고 있는 카메라고 다른 하나는 리키가 들고 있는 캠코더이다. 캠코더를 통해 보는 장면은 관객으로 하여금 관음하고 있다는 것을 지각하게 하고 동시에 바라보는 사람이 현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또 캠코더로 찍는 영상이 바로 제인의 창문쪽을 향해 있는 텔레비전에 동시에 상영된다. 제인이 창가에서 옷을 벗는 모습을 이 구조를 이용해 찍어 촬영하고 있는 리키와 제인의 모습을 커트 없이 동시에 보여준다. 캠코더 영상 말고도 프레임이나 창문이 나오게 찍은 장면이 많은데 이 또한 같은 맥락에서 쓰인 촬영 방법이다. 컴퓨터 화면에 비친 모습이나 샤워 부스 안에서 자위하는 모습은 ‘갇혀 있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와 비슷한 촬영 방식을 우리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에서 본 적이 있는데 그 영화에서도 거울과 프레임을 이용하여 훔쳐보기, 시선의 왜곡을 강조했다. 프레임이 장면을 가리고, 캠코더 영상을 통해 시선이 왜곡되어 갈등과 오해가 생긴다. 반복적 점프컷도 자주 사용되는데 레스터가 안젤라에 대한 섹슈얼한 환상을 할 때 나온다.

등장인물이 많은 만큼 장면전환이 많다. 고전적 헐리우드 형식을 취하는 만큼 교차편집 또한 관객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자연스러운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레스터와 대화를 하다가 제인이 오른쪽으로 퇴장한 후 곧바로 리키가 머리를 빗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카메라 팬 방향을 같게 하여 관객의 몰입을 돕는다. 하지만 마지막 시퀀스의 교차편집은 반전을 위해 의도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직전에 캐롤린이 총을 챙겨 집으로 오는 장면만 나왔기 때문에 관객은 레스터에게 총을 겨누는 사람이 그녀라고 추측하지만 범인은 레스터로부터 거절당한 프랭크이다. ‘왜곡’과 ‘오해’가 <아메리칸 뷰티>의 큰 주제 중 하나라는 것을 생각하면 주제에 너무나 잘 들어맞는 형식이다.

 

puppysizedelephant

[1] <아메리칸 뷰티>의 다면적 수용: 주제, 내러티브 구조, 시각적 내레이션의 분석 (정경훈, 2010)

[2]  욕망의 대상이 아닌 딸로 인식되어 아버지로서의 책임감이 떠올라 중단했다는 해석도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이 회자되는 이유

<천공의 성 라퓨타>(1986)을 중심으로

 

2020년에 미야자키 하야오가 단편영화를 들고 다시 관객을 찾을 예정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전작 주인공들이 모두 사람이었던 반면, 이번 영화의 주인공은 송충이를 닮은 벌레이다. 최근에 공개된 제작 다큐멘터리에서도 나오듯이 이번 영화는 2D 셀 애니메이션이 아닌 3D 디지털 애니메이션이다. 고작 벌레영화가 무슨 중요한 얘기를 할 수 있겠냐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미야자키 하야오의 필모그래피와 이 영화의 개봉시기가 도쿄 올림픽 개최 시기와 일치한다는 것을 고려했을 때 의미심장하다. 은퇴를 몇 번이나 번복해온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번에 굳이 돌아오게 된 이유는 아마 일본의 우경화를 우려해서가 아닐까라고 추측해본다. 모든 예술작품에 정치적 의미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예술작품이 잘 만들어지면 그 어떤 기사와 다큐멘터리보다 더 큰 힘을 가진다.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동안만큼은 스토리에 집중하게 되고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알레고리적 영화에는 그런 힘이 있다. 영화 <바람계곡 나우시카>(1984)부터 나타나는 자연과 문명의 충돌, 여성, 그리고 선과 악의 모호함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까지 반복적으로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의 주제의식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인류에 대한 사랑은 영화 플롯뿐만 아니라 그의 애니메이션 작화에서까지 드러나기 때문에 완벽하다.

모호함

이 세계에는 악당이 있고 우리 편에 있는 선택 받은 자가 그 악당을 클리어하면서 해피엔딩을 맞는다. 반지의 제왕, 스타워즈, 퍼시 잭슨, 해리 포터, 헝거게임… 수많은 시리즈가 이 내러티브를 따른다. 대중문화가 우리의 삶을 반영하는 만큼 우리의 삶도 대중문화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도 이러하다. 확실히 목적을 정해놓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방해요소에는 눈길을 주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모범적 삶인 듯 하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는 이런 내러티브 공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의 세계에는 편가르기가 없고 인물이 하는 행동의 목적도 뚜렷하지 않다. 물론 <천공의 성 라퓨타>(1986)의 주인공 ‘시타’도 선택 받은 자이다. 그녀에게는 어머니가 물려준 비행석이 있고 라퓨타 왕족만이 그것의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시타 말고도 라퓨타 왕족은 있으니 그것이 무스카이다. 그래서 우리는 라퓨타 왕족이 도대체 선한 사람들인지 악한 사람들인지 분간하기가 힘들다. 하늘 위에 떠있는 라퓨타 성도 마찬가지이다. 성의 윗부분은 자연과 라퓨타 왕족이 만든 로봇이 자연을 보호하고 있다. 한편 성의 아랫부분은 같은 로봇이 수류탄을 연상시키는 살인병기 형태로 대기하고 있다. 처음에 각종 폭력을 쓰면서 시타를 납치하려는 해적단도 모호하기 짝이 없다. 초반에는 야만적인 악당으로 보이는 이들의 구성원을 살펴보면 모두 사회로부터 외면 받는 소수자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해적의 대장 ‘도라’는 여성이고 그녀를 ‘엄마’라고 부르는 남자들은 핑크색 바지 차림에 통념적으로 ‘남자답지’ 않은 남자들이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유색인종도 보인다. 그들이 탄 해적선을 운전하는 사람은 노인이다. 해적단은 보물과 식량을 훔치는 집단이지만 사회로부터 추방당한 서로를 위로하기도 하는 집단이다. 해적단과 똑같이 군대와 정부도 보물을 노리지만 그들을 범죄자로 몰면서 자신들의 침략행위를 정당화한다. 이런 모호한 인물 설정은 계속해서 등장하는데 대표적으로 <모노노케 히메>의 에보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가오나시, 그리고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황야의 마녀가 있다. 모호한 캐릭터 설정은 극중 긴장감을 형성해서 극이 끝날 때까지 해소되지 않는다. 특히 <모노노케 히메>에서 멧돼지, 들개, 시시가미, 그리고 주인공 산으로 대표되는 자연의 모호함이 관객에게 주는 공포감은 상당하다. 미야자키의 영화는 주로 그의 이상을 나타내면서 끝내기 때문에 편안한 마음으로 극장을 나갈 수 있지만, 극장 밖으로 나올 때 각자 수수께끼 하나가 주어진 것처럼 알쏭달쏭하다. 사실 변명에 변명을 더하면 모두를 피해자로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런 사고방식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의 판타지적 요소가 이들의 모호함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도 영화의 플롯에서 충분히 근거가 드러나기 때문에 그의 영화를 보면서 관객은 다각적 사고방식을 자유롭게 연습할 수 있다.[1]

자연과 인간문명

캐릭터 설정은 모호하지만 이 주제에 대한 미야자키의 의견만은 확고하다. 최소한의 인공물만을 남기고 자연의 섭리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이상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굉장히 래디컬하고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런 이상을 갖고 살아가야만 파국으로 치닫지 않을 것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에 나오는 자연은 무섭다.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 자연은 가공되지 않은 비행석이 은은하게 빛나는 등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인간과 말로 소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미지의 공포를 산다. 파즈와 시타가 ‘바루스’라는 파괴의 주문을 욀 때 라퓨타 성의 윗부분인 자연은 가차없이 하층부의 인공물을 파괴하고 지구 대기 밖으로 떠난다. 가공된 비행석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한다는 속성도 자연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위압적인 자연의 모습은 <모노노케 히메>에서 정점을 찍는다. 처음 등장하자마자 인류에 저주를 퍼붓는 재앙신부터 마지막에 노여움에 모든 것을 파괴해버리는 시시가미 앞에 인간은 나약하다. 관객은 자연의 전지전능함이 낯설다. 다수의 매체(주로 서양 매체)에서 자연은 항상 인간보다 아래의 것, 귀여운 존재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같은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인 디즈니가 만든 공주 시리즈를 보면 공주에게는 자연을 부릴 수 있는 능력이 있고 항상 귀여운 동물 친구가 있다. 이런 영화를 보고 자란 우리는 자연이 인간보다 월등한 존재일 때, 심지어 인간과 대등한 존재일 때도 두려움을 느낀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라퓨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뚜렷하다. 과도한 과학의 발전은 파멸을 초래하므로 최소한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파즈와 시타가 라퓨타 성을 파괴했을 때 파괴되는 것은 성 전체가 아니라 최소한의 인공물과 자연을 제외한 것들만이 파괴된다. 그들이 성을 탈출할 때도 엔진 없이 바람만으로 조종해야 하는 작은 비행기이다. 라퓨타 왕족이 만든 로봇마저도 라퓨타 성에 남아 이끼에 뒤덮인 채 자연의 섭리를 따르고 있다.

작화에서 보이는 인간에 대한 사랑

어릴 적에 그림을 한번이라도 그려본 사람은 알 수 있을 텐데, 자신이 그리고 있는 인물이 웃음을 짓고 있으면 내 입 꼬리도 올라가고, 인물이 슬프면 나도 슬퍼진다. 물론 그냥 그릴수도 있다. 실제 있는 사람도 아니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최대한 이상적인 몸매와 얼굴을 가진 사람으로 그릴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림에 불과하기 때문에 현실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화가가 사람을 사랑할 때 그가 그리는 인간의 모습은 다양하다. 그 모든 다양한 모습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등장인물은 다양한 외형을 갖고 있다. 물론 <라퓨타>에서 시타가 처음 등장했을 때 <마녀배달부의 키키>의 주인공 키키와 거의 분간이 가지 않았지만 그것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열 살, 열한 살의 어린 여자아이들을 그리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대신 시타가 있으면 아줌마인 도라도 있고, 키키가 있으면 좀 더 성숙한 청소년 우르슬라도 있다. 일본 아니메(재패니메이션)의 스타일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캐릭터의 다양화가 이뤄진다. 이 역시 다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작품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는데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는 여자 캐릭터가 친구가 없어서 한 명만 나와 비교대상이 없다든지, 여자 캐릭터가 두 명 이상이어도 체형과 얼굴이 분간이 안가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셀 애니메이션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현실적인 묘사를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는 요즘에 나오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이나 픽사나 드림웍스 스튜디오에서 만드는 3D 애니메이션이 절대우위이다. <파이퍼>(2016)의 바다거품 묘사는 진짜 물 같고 <언어의 정원>(2013)의 비 내리는 장면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하지만 이런 그림들은 사람들의 가슴을 움직이지 못한다. 가슴을 움직이는 것은 매사 진짜 같지는 않더라도 진심으로 사람을 관찰한 작가가 그린 그림이다. 잠에서 깬 파즈가 일어나 시타를 보며 목과 가슴 언저리를 긁는 모습, 파즈가 트럼펫을 불기 전에 입을 축이는 모습,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가 신발을 신고 출발하기 전에 잘 신었나 신발코를 톡톡 치는 모습, 쓴 경단을 먹은 치히로의 날갯죽지에 힘이 들어가고 발가락을 꼬는 모습. 이런 모습을 그린다고 해서 애니메이션이 진짜 같아 보이지는 않아도 그 인물이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다.[2] 애니메이션은 제작진의 의도가 가장 투명하게 보이는 영화 제작 방식이다. 그림과 카메라 워크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강조할지, 어떤 것을 보여줄지 모두 제작진의 선택이다. 등장인물 모두가 모델 같은(비쇼넨, 미소년) 재패니메이션이나 여자 캐릭터의 다리나 가슴께를 클로즈업해서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의 제작진들이 인류에 갖는 사랑이 클지는 의문이다.

 

일본의 우경화, 브렉시트 그리고 트럼프 당선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면서 특정 집단을 악당으로 몰고 가려는 움직임이 보인다. 일본, 영국, 그리고 미국의 수장은 국가를 ‘안전한’ 곳으로 만들려면, 국가의 ‘경제발전’을 위해서 이 길이 유일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30년 전부터 미야자키 하야오는 지속적인 작품활동을 통해 그것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끝까지 상대방을 복합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파멸을 피하는 길이라고 주장해왔다. 예술작품이 전쟁을 막거나 사회의 가장자리로 몰린 소수자들을 구원해주지는 않는다. ‘아이들이 내 영화를 볼 때 바로 이해하지 못해도 된다. 나이가 들면 저절로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될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말했던 것처럼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우리는 집중해서 공감하는 법을 익히고 예술작품이 제시하는 사고방식을 연습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시간이 지나서 현실세계를 받아들이는데 영향을 미친다. 여느 때보다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싶다.

[1] 확실히 <바람이 분다>(2013)는 실화를 바탕으로 해서 그런지 전쟁과 일본의 침략행위를 미화했다는 평이 대다수이다. 이 영화의 제작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인 <꿈과 광기의 왕국>(2013)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솔직하게 이런 점을 인정하는 듯 하다.

[2] 디즈니 스튜디오의 명작 <미녀와 야수>(1991)에서도 이런 작화가 돋보인다. 플롯은 개연성이 떨어지지만 연인 사이의 움직임을 잘 포착해 성공적으로 설득력 있는 사랑 이야기를 보여준 대표적 케이스라고 생각한다.

 

-2017.2.10 puppysizedelephant